음악

한로로 신보에 대한 단상

nullyet 2026. 4. 14. 22:15

한로로의 음악은 완성도로 설득된 음악이라기보다, 설득력으로 발견된 음악이었다. 초기의 한로로를 지탱하던 것은 정교한 프로덕션이 아니라 러프한 사운드, 다소 투박한 보컬, 그리고 꾸미지 않은 고백같은 가사였다. 각각만 떼어놓고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요소들이었지만, 함께 놓였을 때 묘한 균형을 만들었다. 거칠게 믹싱된 최소한의 세션과 완벽하지 않은 발성은 오히려 가사의 솔직함을 더 진정성 있게 들리게 했고, 그 불완전함 자체가 음악의 정서적 설득력을 완성했다.

그 덕에 한로로의 음악은 하나의 청춘 서사처럼 소비됐다. 세련된 작품이라기보다, 막 음악을 시작한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장면에 가까웠다. 그 어설픔과 ‘입춘’의 메시지, 그리고 아티스트 본인의 성장 서사는 자연스럽게 뒤엉켜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문제는 바로 그 브랜드가 이후의 창작을 설명하는 틀이 되는 순간, 오히려 한로로의 음악을 더 좁게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근 그의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사운드의 정제다. 세션의 밀도는 높아졌고, 전체적인 프로덕션은 분명 이전보다 매끄러워졌다. 그런데 이 변화는 단순히 “더 좋아졌다”거나 “더 나빠졌다”로 정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곡의 설계가 예전처럼 그 거친 질감을 자연스럽게 감싸주지 못하고 있다. 초기에는 비정제감이 곧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그 질감이 음악의 일부로 녹아들기보다 종종 밖으로 드러나는 요소처럼 느껴진다.

보컬은 여전히 아마추어적인 질감을 지니고 있다. 그것 자체가 결함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의 한로로에게 그 투박함은 음악의 핵심적인 매력이었다. 그러나 트랙들이 전반적으로 소위 '돈 맛이 나는' 사운드를 낼수록, 보컬이 감정을 전달하는 장치라기보다 곡의 결을 거슬러 보이는 표면으로 인식된다. 러프한 음악 속에서는 개성이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음악 속에서는 곧바로 균형의 문제로 이어진다. 마치 스케치북에서 자연스럽던 크레파스가, 매끈한 잡지 위에서는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가사 역시 약간의 부침을 겪고 있다. 초기의 가사는 솔직했고, 말하고자 하는 감정의 중심이 분명했기 때문에 다소 직접적이더라도 곱씹게 되는 구절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가사에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청춘을 대표하는 음악’, ‘국문과 락스타’ 같은 슬로건은 한로로를 설명하는 데는 유효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규정하는 틀이 되었다. 그 틀 안에서 추상어와 이미지로 무장한 시의 문법들은 난사되기 시작하고, 정작 그들이 향하는 감정의 초점은 흐려진다. 문장은 더 화려해졌는데 감정은 더 멀어지는 것이다.

결국 지금 한로로 음악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은 개별 요소의 실패라기보다, 관계의 재배치에서 생긴 불균형에 가깝다. 소박한 세션, 러프한 믹싱, 솔직한 가사, 투박한 보컬이 서로를 보완하며 만들어냈던 초기의 ‘아마추어 감성’은 한로로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그 감성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고, 그 브랜드가 곧 기대치가 되는 순간부터 음악은 다른 설명을 요구받게 된다. 문제는 성장 자체가 아니라, 성장 이후에도 과거의 설득 방식이 그대로 유효할 거라고 기대하는 태도다.

사람들이 한로로에게 기대했던 것은 세련된 완성도가 아니라 솔직한 어설픔이었다. 그리고 그 어설픔은 초기 한로로 음악의 가장 큰 무기이자, 가장 강력한 서사적 장치였다. 하지만 이제 그 장치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파들파들 떠는 새싹처럼 봄을 기다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봄을 지나쳐 버렸고, 그 이후의 계절을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는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한로로의 현재는 성공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성공이 만들어낸 미학적 압력의 현장이기도 하다.